[소설 가작] 미래로부터
미래로부터 작품 감상 링크: https://blog.naver.com/smuhakbo/222592462599 그 동네는 음식에 소금치는 법이 없었다. 바닷가 근처에 자리 잡은 오래된 마을은 아침에 깔린 안개에도 소금기가 있어 입안이 짜다 못해 썼다. 한아네 집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횟집을 운영했다. 바람이 펄럭거리는 소리와 생선이 펄덕대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곳이었다. 한아는 그게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동정이 헤픈 편은 아니었으나 횟집 앞 수조를 들여다보며 한아는 자주 동정했다. 저 좁은 수조가 온 세상일 거라 생각하니 눈 몰린 광어가 측은했다. 일곱 살 무렵에 한아는 장사하는 엄마 몰래 수조에서 광어를 꺼내 품에 안았다. 물 안에서는 숨은 쉬는지 움직임 하나 없더니 한아의 품 안에선 펄떡거리며 생명의 끈을 튕겨댔다. 그날따라 한아는 물고기를 바다에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는 그 생선을 품고 근처 바다로 향했다. 미끈거리는 놈은 힘이 어찌나 센지 한아의 두 팔이 후들거렸다. 작은 보폭으로 뛰듯이 걸었다. 모래사장을 가로지를 때쯤엔 광어가 얌전해졌다. 물고기가 얌전하다는 뜻은 좋은 게 아니었다. 아가미 달린 것들이 그랬다. 한아가 걸음을 멈추고 광어를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려줬다. 바닷속에서 어색한 듯 힘겹게 꼬리를 턱턱 흔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이내 배를 뒤집었다. 파도가 치는 물결 따라 몸이 둥둥거렸다.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며 광어의 숨이 멎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한아의 눈가에 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바다로 한 방울씩 떨어졌으나 고작 인간의 눈물이라 티가 나질 않았다. 어쩌면 그 광어의 순리는 바다가 아닌 수조였을 수도 있겠구나. 무언의 깨달음과 무언의 순응을 배운 한아의 뒤로 잔뜩 화가 난 엄마가 보였다. 장사할 생선을 대체 왜 네 맘대로 꺼낸 거야! 엄마의 불같은 호령에도 한아의 시선은 바다에 박혀있었다. 다시는 살아있는 무언가에 동정하지 않을 거야. 어린 한아는 체념을 배웠다. 그런 한아가 다시 동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미래였다. * 나는 미래라고 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미래가 아닌 걸 알았다. 교탁 옆에 서있는 애는 겉모습은 인간이었으나 무언가 축축했다. 맨 끝자리에서 무심히 시선을 던지는 한아도 저 아이가 인어라는 걸 알았다. 한낱 인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처럼 사라질 인어. 인간의 대타인 인어. 인어는 흔했다. 특히 바닷가 마을에선 더더욱 그랬다. 아마도 정부에서 관리하는 인어일 것이다. 미래라는 인어 앞으로 수십 명의 목숨줄이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인간들은 인어를 물건 대하듯 대했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하고 과학이 새로운 기술을 내놓아도 죽음은 인간 곁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연도 가지각색이었다. 누구는 간이 필요했고 누구는 심장이 필요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신의 장기를 주는 일은 확률이 희박했다. 그 확률에 대기자들은 목숨을 걸었다. 숨 막히는 확률에 질린 생명공학자들이 눈을 돌린 게 인어였다. 미래는 장기기증 전용 인어로 태어났다. 인간인지 어류인지 아주 애매했다. 미래는 누군가의 따뜻한 뱃속이 아닌 차가운 시험관에서 탄생했다. 축복이 아닌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태어난 미래는 불릴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다. 탄생부터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모두를 미래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공장식이었다. 양계장에서 닭 키우듯 인어를 키웠다. 겨우 몸 하나 들어갈만한 수조를 빽빽이 채워 인어를 한 마리씩 넣었다. 그게 인어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렇게 길러 낸 인어가 처음으로 밖을 나서는 순간이 있었다. 목적지는 병원이었고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가는 게 순간의 마지막이었다. 세상의 공기를 처음 들이신 장기들이 각기 다른 인간의 몸뚱어리로 이식됐다. 인어는 가죽만 남은 채 태워졌다. 운명이 기구했다. 그러다 윤리 단체가 공장식 인어 사육을 전면 교정하라며 시위를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인어의 권리를 생각해 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개살구였다. 공장식으로 자란 인어들의 장기 상태는 질이 떨어졌다. 심장 판막이 헐겁게 자라는 인어가 존재했고 폐에 구멍이 뚫려 물이 자꾸만 몸속으로 들어오는 인어가 존재했다. 가장 소리를 크게 외친 건 윤리 단체의 회장이었다. 우습게도 회장은 작년에 어린 인어의 콩팥을 이식받았다. 그것에 대한 속죄인지 혹은 또다시 한번 필요할 수도 있는 여분의 콩팥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버렸고 인어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도대체 이 순리는 누가 만들었지. 희생은 위해서 생기면 안 되는 것인데 인간들은 지구보다 역사가 짧아 그걸 몰랐다. 결국 윤리 단체들과 시민들의 반발로 몇 해 전 법이 개정됐다. 장기이식용 인어는 만 17세까지 일반 사회에서 어울려지내야 했다. 학교를 다니며 인간 학생들과 지내야 했다. 건강해야 했다. 독단적인 행동을 할 수 없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창살 없고 아주 넓은 수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국가가 지정해 준 지역에 인어를 할당제로 배부했다. 배부가 꼭 맞는 표현이었다. 마치 반려견을 들여오듯 지역에서 정해진 숫자의 인어를 도맡았다. 그런 사회는 미래로부터 차가웠다. 미래가 가진 하나의 심장 앞에 천 명씩 줄을 서놓고 정작 심장의 주인인 미래에게는 냉담했다. 미래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앗아갔다. 전화를 걸어 가족들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는 행위조차 미래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애초에 가족을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미래는 대부분 홀로 태어났고 홀로 떠났다. 자연스러워 아무도 반문하지 않았다. 감히 인간에게 반문하는 인어 따위는 없다. 인간은 인어에게 전지전능한 신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런 인어 미래가 한아의 반으로 왔다. 아마 할당제로 들여온 인어 중 하나일 것이다. 한아는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빙 둘러보다 한아의 옆자리에서 눈동자가 멈췄다. 짧은 소개를 마친 미래를 1분단 끝자리로 안내했다. 드르륵, 듣기 싫은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한아의 옆자리로 미래가 앉았다. 미래는 숨소리가 작아 인기척조차 없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건 아니고? 한아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미래는 조용했다. 마치 그래야 될 것처럼 소리를 죽이고 존재감을 죽였다. 수업에 성실히 임했고 숙제도 척척해왔으나 어쩐지 눈에 띄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아가 옆자리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한아도 소란스러운 것은 질색이었기에 짝꿍으로서 미래가 싫지 않았다. 허나 모든 마음이 한아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야 너 진짜 인어야?” “꼬리 보여줘 봐.” “아가미는? 숨은 아가미로 쉬나?” 세상에 딱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면. 그게 관심과 무관심이라면. 분명히 무관심이 나았다. 미래가 자신이 살아오면서 혹은 인간들에게 길러지면서 습득한 결론은 그랬다. 미래는 분노보다 순응을 먼저 배웠다. 화를 가르치기 전에 침묵과 복종을 가르쳤다. 평범한 인간 고등학생들처럼 학교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니란 걸 안다.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지만 어쩐지 미래는 자기가 죽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게 슬프거나 원망스러운 건 아니었다. 마치 우주를 관통하는 순리이겠거니 받아들였다. 발악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인정하는 것이 편한 순간이 있었다. 세상이 관심과 무관심 둘로 나뉘는 것처럼 이 작은 반 아이들 역시 그랬다. 무관심은 차라리 낫다. 미래가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주는 아이들은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문제는 관심의 영역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아주 좁은 어항에 그득 찬 물고기들 사이에 미끼로 내던져진 격이었다. 줄에 대롱대롱 걸린 미래는 아주 보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말 좀 해봐. 아 인어라서 목소리가 안 나오나?” 낄낄거리는 소리가 역했다. 미래는 가만히 작게 웃고만 있었다. 쉬는 시간에 책상 위로 엎어져있던 한아는 귓가에 닿는 소리에 잠이 깼다. 깨고 보니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이 샜다. 뭘 좋다고 웃고 있는 거야. 미련한 건지 천치인지 헷갈렸다. 자기 세뇌를 걸었다. 이건 동정이 아니야. 그냥 시끄러워서. 난 시끄러운 게 싫으니까. 동정은 아니야. 한아가 주문을 세 번쯤 외우고 참다 참다 입을 뗐다. “어. 얘 인어라서 말도 못 하고 내가 대신 말해줘야 되는데 지금 너네 다 꺼졌으면 좋겠대.” 입꼬리가 전혀 올라가지 않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말이 뚝뚝 갈라지는 얼음 같아 미래는 입술에서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은 아닌지 힐끗 쳐다보았다. 한아는 진저리 난다는 눈으로 미래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응시했다. 한아는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관계를 쌓고 유지하는 일에 피곤함을 느꼈다. 친구를 사귀어서 얻는 기쁨보단 사귀어서 생길 귀찮음에 중점을 두었으니 반 아이들과 친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런 한아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 아이들 입장에선 낯설었다. 쟤가 말도 할 줄 아는 애였어? 황당해하는 얼굴로 한아와 미래를 번갈아 쳐다보던 아이들은 음침한 것들끼리 쌍으로 잘 만났네.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끝까지 치졸했다. “어떻게 알았어?” “뭐가.” 말 한마디 하지 않던 미래가 입을 달싹거리더니 문장을 뱉었다. 겨우 한 문장 되는 말에 조심스러움이 가득 담긴 게 느껴졌다. 한아는 그다음 교시인 문학 교과서를 가방에서 꺼내다 고개를 들어 반문했다. “꺼지라고 하고 싶었던 거...” 우물쭈물하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폼이 퍽 웃겼다. 화는 못내도 감정은 있구나. 그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쩌면 없는 게 낫진 않았을까 생각했다. 상처받을 바엔 느끼지 못하는 쪽이 덜 아팠다. 인간들은 대체 왜 인어를 혐오할까. 같은 인(人)을 공유하는 것을 부정이라도 하는 듯 하급 시민 취급을 했다. 인어가 없으면 죽어나가는 인간이 그토록 많은데도. 인간은 자꾸만 가르치려 들어서 탈이다. 동물을 가두어 동물원을 만들고 바다에서 살던 아이들을 빌딩 가득한 도시 수족관으로 자꾸만 데려왔다. 그건 그 아이들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일종의 납치다. 우리 밖에서 구경하며 유리벽을 쾅쾅 쳐대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감정이 있고 의식적 사고를 하는 인어까지 탐냈다. 온전한 인간은 아니니 동물 취급을 해도 됐고 동물이라기엔 인간과 똑같은 장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활용하기 좋았다. 자신들이 죽지 않기 위해 인어를 자꾸 죽였다. 생의 윤리가 꼬여가고 있었다. 미래의 말에 한아가 생각에 빠져 답이 없자, 미래는 익숙하다는 듯 혼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까 나한테 꼬리 보여줘 봐라고 했던 애 있잖아. 걔 사실 나 인어인 거 이미 알아. 올해 초에 걔내 엄마가 내 비장 이식받아 갔거든. 병실에서 만났었어. 그리고 우리 반 담임선생님 동생도 작년에 내 간 반쪽 이식받았어. 그래서 그런지 친절하게 대해주시더라. 내 비장. 내 간. 한아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몸에서 직접 꺼내어 볼 수도 없는 장기들이 미래의 입에선 툭툭 쉽게 튀어나왔다. 자신의 방 어딘가에 있는 물건 말하듯 장기를 이야기하는 미래가 소름 끼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짚고 넘어갔어야 할 근본적인 물음이 한아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그래서 꼬리는 진짜 있어?”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결국 한다는 게 이런 질문이다. 꼬리는 인간 따위에게 없으니까. 오직 미래만이, 인어만이 가진 것이니 묻고 싶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한아는 그 아이만 가진 것이 궁금했다. “응.” “진짜?” “응 있어. 물에 들어가야만 볼 수 있어.” 미래가 목소리를 얕게 낮추고 이야기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에 대해 말해본 것이 처음이라는 듯 숫기 없는 얼굴이다. 한아는 타인과 가까워지길 싫어하는 게 맞다. 그 이유는 아주 복합적이고 오래된 조건 같은 것이라 불변의 진리 같았다. 살다 보면 다양한 경우의 수에 마주친다. 한아는 확률에 약해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상황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계산하기가 어려웠다. 학교 가는 버스를 탔을 때 그날따라 예민하고 호통을 치는 기사님을 만나면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고 어린 고등학생을 무시하는 가게 직원을 마주칠 때도 감정이 바닥을 쳤다. 한아의 감정 소쿠리는 내구성이 아주 약한 편이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나 어릴 적엔 툭하면 울고 상처받았다. 그땐 나이가 무기인 시기라 ‘김한아’ 앞에 오는 한 자릿수 나이로 이해를 받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우는 것도, 매일매일 상처받는 것도 지겨워 한아는 경우의 싹을 자르기로 마음먹었다. 문을 닫고 자신이 상처받지 않을 상황이 보장된 루트만 품었다. 그제서야 삶이 삶 다웠다. 그런 한아에게 미래는 보장되지 않은 루트였다. 미래와 지낸다면 자신이 상처를 받을지 혹은 무탈할지가 확인이 불가능했다. 원래 한아가 살고 있는 삶의 조건이라면 미래와 엮이지 않는 게 맞았다. 괜찮을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괜찮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더군다나 미래는 인간이 아니라 변수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아는 자꾸만 미래가 괜찮을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애초에 괜찮지 않다면 인간에게 장기를 선뜻 내어줄 리가 없다. 그러니 미래는 괜찮을 거다. 평소라면 길게 이어지지 않았을 대화가 한아의 말로 꼬리가 이어졌다. “네 꼬리는 무슨 색이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엄청 반짝거리던데.” “푸른색이야. 드라마처럼 반짝거리진 않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그렇긴 한데 연구실에 있으면 햇빛 볼일이 거의 없으니까...” 대체 이 아이에게 주어진 것이 있긴 한가. 미래 입에서 나오는 문장 속에서 자유와 의지랄 것이 없었다. 억압과 명령이 가득한 곳에서 살다가 죽어야 했다. 미래는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국가에서 할당된 정식 인어이기에 인간들과 사회 교류도 하고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아무도 친구가 되려 하진 않았지만. 대체 인간들은 인어를 인어로 봐준 적이 있긴 한가. 누군가의 대체품처럼 사용하다 버리고 또 다른 인어를 연구실에서 공장식으로 키우는 것이 끔찍했다. 나라도 해야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그들을 한낱 인간 대용이라 대할 때 나라도 그들을 인어로 대해줘야지. 그래서 한아는 미래가 미래 다운 모습이 보고 싶었다. 두 다리보다 하나의 꼬리로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나리 해변 지나치는 23번 버스 타고 집에 가는데 너는?” “어?” “집에 뭐 타고 가냐고. 걸어 다녀?” “아... 아니, 나도 23번 타. 정부에서 마련해 준 숙소 가는 버스가 그거뿐이라...” “잘 됐다. 나중에 같이 집 가다가 해변에서 내리자.” “왜?” “네 꼬리 궁금해서. 수영 잘하지?” “응. 나쁘지 않지.” 미래가 웃으며 말한다. 그럼에도 눈빛에서는 네가 나에게 대체 왜, 라는 물음이 읽혔다. 세상이 미래에게 단 한 번도 숙여준 적이 없어 미래는 지금 모든 게 낯설었다. 인간 친구를 사귀는 것도, 동등한 입장에서 인간과 이야기를 해본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한아는 티를 내진 않았으나 탄식했다. 세상이 얼마나 박하게 굴었으면 고작 이런 걸로 웃고 기뻐하나. 미래와 한아가 가까운 미래를 약속했다. 춥지 않고 날씨가 좋은 날 둘은 해변에서 내릴 것이다. 인어에게만 존재하는 꼬리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아는 미래가 마음에 들었다. * 한아와 미래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아침에 학교를 오면 가장 먼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찾았다. 급식을 함께 먹었고 쉬는 시간 내내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웃기 바빴다. 그들은 반에서 비주류에 속했으나 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다수가 옳은 쪽에 서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는 같은 반 아이들을 일주일에 다섯 번씩이나 볼 수 있는 규율과 제도가 확립된 공간이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은 매일 봐도 매일 즐겁기에 아침 조례 시간마다 시끌벅적하게 반가워했으나 한아의 경우 반가움의 농도가 더 짙었다. 이유는 미래는 이 규율과 제도 속에서 예외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미래는 아무 말도 없이 삼일을 내리 결석했다. 주말까지 보낸 후 월요일에서야 한아와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미래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한아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어릴 적 읽은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애가 정말 물거품처럼 사라진 건 아닐까, 라는 결론을 도출하다 이내 그만뒀다. 오랜만에 마주한 미래의 얼굴에는 동그란 안경이 걸려있었다. 까만 뿔테안경이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미래의 콧잔등에 내려앉아있다. 안경 아래의 왼쪽 눈이 하얀 거즈로 가려져있었다. 한아는 앞문을 열고 자리로 다가오는 미래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문에서 1분단 끝자리는 고작 몇 미터 되지도 않는 대각선 거리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미래가 책상 모서리에 여기저기를 부딪혔다. 쿵. 쿵. 숨소리도 작은 미래가 우당탕 거리며 오는 광경이 낯설었다. 미래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큰 소리를 내며 한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아 안녕.” 오랜만에 인사를 건네는 게 자신도 머쓱한지 미래가 뒤통수를 몇 번 긁적였다. 여기서 어떤 대답이 적절할지 몰라 한아는 고민했다. 한아의 마음속에서 가장 많이 부유하는 감정은 단연 걱정이었다. 그리고 조금의 서운함과 반가움. 한데 뒤섞여서 어떤 감정부터 꺼내야 할지 한아는 조금 멀미가 났다. 감정은 가슴속에 묵혀두면 고여 썩기 마련이기에 한아는 차례대로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학교 왜 안 나왔어? 걱정했잖아.” “아... 병원에 좀 다녀왔어.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나도 대부분 갑자기 가는 일이 많아서.” 한아는 그 말이 미래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미래가 자발적으로 병원에 가는 순간이 있긴 할까. 타의에 의해 병원에서 자신의 무엇을 잃고 돌아오진 않을까. 삶이 잔인했다. 미래의 가려진 한쪽 눈을 보자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속이 메슥거렸으나 티를 낼 순 없었다. 한아 자신도 인간이었으니까. 미래를 그렇게 만든 존재와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우습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를 말이 없기도 했다. “눈은... 왜 그래?” 어렵사리 거르고 걸러낸 물음이었다. 알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미래의 눈에는 또 어떤 사연이 짓눌려 있을까. 또 어떤 인간이 미래의 것을 탐낸 걸까. 미래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동네에 행복 슈퍼집 애기 알지. 열두 살 이랬나. 슈퍼 아저씨 딸이 눈이 잘 안 보인대. 그래서 어, 음... 주고 왔어. 생각보다 일찍 끝나더라 잘 쉬고 왔어. 안경도 사주시더라. 그래서 이왕 사준다는 거 제일 비싼 걸로 골랐다? 잘 어울리지. 미래가 내뱉는 말마다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주고 오긴 뭘 주고 와. 한아는 그 소리가 빼앗겼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건 강도질이다. 도둑질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옳은 게 없었다. 화를 내기엔 이미 벌어진 일이고 울어버리기엔 한아는 미래에 비해 잃은 게 하나도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실없이 안경이 잘 어울린다며 말을 얹었다. 미래는 희미한 웃음으로 응답했다. 미래가 왼쪽 눈을 잃어도 미래는 미래다. 미래가 이제 오른쪽 세상만을 바라봐도 미래는 미래였다. 비록 한아가 왼쪽에서 다가오면 조금 늦게 알아차리고 책상과 벽에 부딪히기 일쑤였지만 어쨌든 미래였다. 한아는 걸음이 느려진 미래를 위해 발맞추어 걸었다. 안경은 시작이었다. 미래가 가끔씩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마다 한아는 이번엔 또 어떻게 발맞추어 걸어줄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디 이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랐다. 그거면 된 거라고 위안했다. *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다는 푸르러서 모든 게 선명한 날이었다. 물이 가득한 동네라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았는데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희귀한 하루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불어 나뭇잎도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바다도 파도를 잃은 것처럼 잔잔했다. 미래는 꾸준히 학교에 나왔다. 당연했던 게 정말로 당연해진 거 같아 한아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문학 시간에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고전 소설도 오늘만큼은 지루하지 않았다. 창가 커튼이 살랑거리며 나풀거리는 자리에 앉아 한아는 창밖을 내다봤다. 생기 가득한 열기로 시끄럽게 체육 수업을 받는 운동장의 아이들이 보였다. 살아있는 것들이 곳곳에서 한아의 피부로 느껴졌다. 오늘따라 미래는 조금 더 차분했다. 평소에도 소란스럽고 활발한 성격은 아니긴 했으나 그 정도가 더 깊었다. 한아가 쫙 핀 손바닥을 들어 미래의 눈앞에서 몇 번 흔들었다.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미래의 시선이 그제서야 한아에게 닿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별일 없어.” “기분 안 좋아 보이길래.” “그랬나? 아, 한아야.” “왜?” 한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유약했다. 호기롭게 이름은 불렀으나 잠시 미래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한아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미래는 자신이 기계는 아니지만 무언가 오작동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오늘 학교 끝나고 시간 돼?” “오늘? 되기는 하는데...” “그러면 나 수영하는 거 구경할래? 왜 그때 내가 꼬리 보여준다고 그랬었잖아.” “아 맞아. 근데 왜 오늘이야?” “그냥. 날씨가 좋길래.” 미래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방금까지 흐렸던 표정과 상반되는 얼굴이었다. 그 언젠가 미래와 한아가 한 약속이 있었다. 인간은 없고 인어 미래만 가지고 있는 꼬리를 유일하게 궁금해했던 인간. 미래는 오늘 그 약속을 지켜주고 싶었다. 약속은 유리병처럼 깨지기 쉬운 단어였으나 실은 지키기 위해 탄생한 것이었다. 한아의 볼이 슬금슬금 올라가더니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오늘 해변에 가자. 응답이 날씨처럼 시원하게 돌아왔다. 학교가 끝나고 둘은 해변을 지나치는 버스에 올라탔다. 맨 뒷자리에 붙어 앉아 창문을 바라보며 내릴 역을 셌다. 바닷가 동네의 장점이자 단점은 바다가 있다는 거였다. 어쩔 땐 짜고 비린 바다가 꼴 보기 싫다가도 오늘 같은 날에는 바다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도시에 살았다면 아마 미래의 꼬리를 보긴 어려웠겠지. 처음 보는 인어의 꼬리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가늠이 안됐다. 그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만 접했지 실제 움직이는 인어의 꼬리는 처음이었다. 탈탈거리며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해변 앞 정거장에서 멈춰 섰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벨을 누르고 한아와 미래가 버스에서 내렸다. 여전히 날씨가 맑았다. 동네 사람들만 알음알음 아는 해변에는 운이 좋게 아무도 없었다. 새까만 돌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도 앞에서 오랜 시간 동안 깎여버린 돌들은 뾰족하고 울퉁불퉁해서 쉽게 걷기 어려웠다. 자주 부딪히는 미래를 위해 한아가 손을 내밀었다. 본래 바다의 주인은 미래인데 한아가 미래를 이끌었다. 역설적이었다. 미래는 바다가 처음이었다. 관 같은 유리박스가 아닌 넓은 바다에서 헤엄쳐보는 일이 평생소원인 시절도 있었다. 미래가 한아의 손을 놓고 두 다리를 바다에 담갔다. 점점 더 깊은 물로 나아갔다. 딱히 무섭진 않았다. 태초에 미래의 근본이 있던 공간이었다. 발목을 찰랑거리던 물이 명치까지 왔을 때쯤 자연스럽게 두 다리가 하나의 꼬리로 모아졌다. 철썩거리며 한아에게 물을 튀기니 미간을 구기며 웃는다. 저 먼바다를 자유로이 헤엄치는 미래를 향해 한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미래야!” “...” “멋있다. 네 꼬리.” 새파랗게 눈부셨다. 반짝거려서 눈이 아플 정도였다. 세상에서 빛나는 모든 보석을 가져다 대도 기죽지 않을 거 같았다. 한아의 말에 미래가 무겁게 웃었다. 수면 아래로 꺼지더니 한참을 유영했다. 자유로움이 온몸을 감쌌다. 한참을 헤엄치며 바다를 느끼던 미래가 뭍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결심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거리더니 머릿속에 흐트러져있던 문장을 조합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한아야.” “응 왜?” “나 내일부터는 학교에 오지 못할 거야.” “뭐?” “갑자기 통보해서 미안해.” “왜? 또 병원에 가는 거야? 아님 연구실로 돌아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아가 재촉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물의 것들은 바다와 떨어지면 좋을 게 없었다. 그 언젠가 어린 한아가 품에 안았던 물고기가 그랬다. 그때 그 물고기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한아의 눈앞에서 오래되어 먼지 쌓인 기억이 울렁거렸다. 바다에서 올라온 미래가 한아의 앞에 가만히 있는 게 이질적이었다. 과연 내일 만일까? 영영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또 뭔데. 간도 뺏기고 비장도 뺏기고 각막까지 뺏겼는데 또 뭘 가져가겠다는 건데. 한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이 잘 해준 거조차 없는데 가진 거마저 악착같이 빼앗아 드는 꼴이 역겨웠다. 그나마 그동안은 괜찮았다. 미래는 자주 떠났었지만 자주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무언가 좀 달랐다. 미래가 운다. 진주알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소리조차 없다. 미래는 매번 죽임을 당하다 못해 소리까지 죽이며 울었다. 삶이 악당 같다. 이 아이의 인생에 대체 영웅이랄 게 있는지 의문이었다. 우는 입에서 더듬더듬 단어들이 새어 나왔다. 이번엔 심장이래. 심장이라 그런지 하루 전에는 알려주더라. 근데 너한테 꼬리를 보여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왔어. 모든 걸 다 빼앗긴 인어가 한아 앞에 있다. 주어진 시간이 적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쥐어짜서 미래는 한아에게 선물했다. 해변 근처로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매일 버스를 타고 가던 미래의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도착했다. 심장이 중요하긴 한가 봐. 자동차로 데리러 와주네. 가슴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미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짓무른 눈가로 굳어있는 한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아야.” “......” “너는 내 인생에서 기억 남을 유일한 인간이야.” “......” “너무 슬퍼하진 마.” 한아가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 소리 내며 울었다. 울음이 서글퍼서 주위의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낮췄다. 바람도 멈춰 서서 한아가 마음 놓고 울 수 있게 배려했다. 한아가 고개를 흔들며 가지 말라 미래의 손을 붙잡았다. 축축하고 차가웠다. 미래가 다정 어린 손길로 단호히 손을 떨어트렸다. 유약한 목소리로 미래가 한아에게 안녕을 고한다. 고마워. 잘 있어. 아프지 마. 끝까지 남 걱정이었다. 자신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심장을 내어주는 주제에. 미래가 점점이 멀어진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빠른 속도로 한아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멍했다. 이별은 형체가 없어서 대체 왜 이러는 거냐며 따져 물을 수도 없다. 누군가를 죽여가며 살리는 것도 구원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꽉 찬 교실에 딱 한 쌍의 책상과 의자만이 텅 비어있었다. 주인을 잃은 자리가 공허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미래가 떠났다. 미래는 누군가의 미래를 살리기 위해 떠났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게 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한아에게는 내일이 있지만 미래에게는 내일이 없다. 모두에게 미래가 있는데 오직 미래에게만 미래가 없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윤지예(글로벌지역학부) 좋아하는 계절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다가올 2022년을 조금 더 일찍 기분 좋게 시작하라는 뜻이라 생각이 듭니다. 기회주신 상명대학교 학보사도 감사드립니다.
[소설 입선작] 바다가 부른다
바다가 부른다 작품 감상 링크: https://blog.naver.com/smuhakbo/222592459853 나는 사주에 물이 없이 태어났다. 나를 처음 본 외할머니는 갓난쟁이인 나를 안고 딱 한 마디 하셨다고 한다. 얘는 평생 바다에 살아야겠다. 그 때 엄마는 속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었더란다. 딸은 서울에 보내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으셨다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와의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바다에 유골을 뿌리러 나간 날은 똑똑히 기억한다. 평소 엄마가 치마를 입히려 하면 울며불며 거부하던 나였지만, 그 날은 어딘지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에 아무 말 없이 검은 원피스와 구두를 신었다. 촌스러운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길은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왜 바다에 가냐는 물음에 엄마는 외할머니를 바다에 보내드리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외할머니는 분명 하늘나라에 가셨다 했는데 오늘은 바다에 보내드린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다장의 모습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바다에 유골함과 꽃을 떨어뜨렸고, 사람들이 울었고, 바다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른들이 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배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왜 울어? 누군가가 물어왔다. 나는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다 울잖아. 사람들이 울면 너도 울어야 해? 정말 순수한 말투였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오는 어떠한 사념에 가까웠다. 고개를 든 나는 발화자를 찾으려 배 바깥을 둘러보았지만 넓은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습한 바닷바람에 멀미가 났다. “누구야?” 내가 물었다. 대답은 배 바깥에서 들려왔다. 나는 나야 우리는 우리야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내 키보다 큰 난간을 붙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에 부딪혀 하얗게 갈라지는 바닷물이 보였고, 바닷물이 반갑다는 듯 나를 향해 웃었다. 바다가 나를 향해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린 아이에겐 어떤 마법 같은 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말이 들려? “응. 들려.” 내가 코를 훌쩍이며 대답하자 바다는 기쁘다는 듯 한 번 크게 일렁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내게 말을 건네는 바다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존재와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나는 기뻤다. 울지 마.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바다가 말했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우는 배에서 홀로 위로를 받은 날이어서, 그 날만은 잊을 수가 없다. 바다와 처음 대화한 그 날. 그 날부터 원래는 들리지 않던 말소리가 시시때때로 바닷가에서 들려왔다. 주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한 말이었다. 나는 그 사소한 말에 대답을 해주기 위해 매일같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나섰다. 집 근처 포구부터 거리가 좀 있는 해수욕장까지. “바다에 뭐 볼 게 그렇게 많다고 매일같이 가자 그래.” 항상 나를 따라 나온 엄마의 푸념이었다. 엄마, 바다가 말을 한단 말이야. 내가 말하면 엄마는 ‘그래, 그렇겠지’하고 대충 대꾸해줬다. 어린 아이가 하는 평범한 상상 정도로 치부하신 모양이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동생도 유치원생이 됐을 땐 동생에게도 바다와 대화를 시키려 해봤다. 동생은 내가 바다랑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는데, 그래서인지 늘 자기도 말을 할 수 있는 척했다. “방금 바다가 뭐라 했어?” “응? 배고프대.” “거짓말 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말하면 동생은 얼굴이 붉어져선 빼액 울어댔다. 나는 동생이 바다랑 말을 못 하는 게 답답해서 지적을 했을 뿐인데, 동생은 그걸 굉장히 자존심 상해 했다. 결국 엄마는 동생 앞에서는 바다랑 놀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으셨고, 나는 혼자 바다를 보게 됐다. “왜 내 동생은 너랑 말 못해?” 몰라 너는 할 수 있잖아 “나도 몰라. 나는 그냥 들리는데, 해인이는 안 들린대.” 바다는 딱히 내 동생에겐 관심이 없었다. 내 동생뿐만 아니라 대체로 모든 인간에게 그랬다. 바다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돌고래 떼가 지나갔어 “진짜? 다시 불러오면 안 돼?” 걔넨 여기 없어 “왜. 너는 부를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바다가 키득키득 웃고 파도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을 지나갔어 바다의 말은 대체로 내 또래 아이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했지만 종종 알아듣기 어려웠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바다와 대화한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아냈는데, 바로 바다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체 뭐로 이루어진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바다는 늘 여러 목소리로 말했고 종종 자신을 ‘우리’라고 칭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가 내게 전해주는 소식은 꼭 우리 동네 바다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바다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는 점은 또 다른 특징이자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매일매일 달랐다는 점이다. 어떤 날 바다는 하루 종일 살갑게 굴었고, 어떤 날은 네 살배기 아이처럼 저녁 늦게까지 자기랑 놀자고 떼를 썼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래주기도 하고, 돌변해서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렸을 땐 그게 이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일곱 살 땐가, 모래놀이를 하고 있던 내게 바다가 갑자기 분노하며 달려든 적이 있었다. 성난 파도가 내가 쌓은 모래성을 무너뜨리고 다시 수그러들었다. 내가 짜증스레 몸을 일으키자 바다는 토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두 우리를 싫어해 “누가?” 우리 말을 듣는 건 너밖에 없어 이번엔 조금 화가 난 어른 목소리였다. 나는 내 모래성을 무너뜨린 바다 때문에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 참이었다. “집에 갈래.” 나랑 있자 우리랑 있자 가지 마 바다가 어린아이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파도가 내 발목을 한 번씩 치고 다시 미끄러져 내려갔지만, 당연히 나를 붙들 순 없었다. 나는 바닥에 있던 모래 삽을 주워서 돌아섰다. 바다는 뒤에서 ‘우우우’하고 괴로워하는 소리를 냈지만 더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 날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엄마는 옆 지역 어선이 전복됐다는 뉴스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계셨다. 아빠는 사람들 구하러 갔어. 그 말에 나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해가 사라진 바깥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만이 혼자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고, 그건 일곱 살 어린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절규였다. 그 날 나는 귀를 틀어막고 엄마 품에 안겨 울다 잠들었다. 아마 그 때가 처음으로 내가 바다를 무섭다고 생각했던 날일 것이다. 나는 바다에서 사람이 죽기도 한다는 걸 그 날 처음으로 인지했으니까. 내게 제멋대로 구는 바다는 그래도 내 친구였지만, 사람을 죽이는 바다는 아주 낯선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직접 느끼지 못하는 사실은 결국 뇌리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 다음 날 바다는 내게 한 없이 다정했고, 내가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수영을 하게 도와줬다. 바다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나를 끌어줬고, 돗자리에서 깜박 졸던 엄마가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서야 나를 도로 해변으로 돌려보냈다. 얼굴에 물 한 방울 묻지 않고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주저앉으셨지만, 어렸던 나는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바다는 나에겐 특별해. 나는 바다에 절대 빠지지 않고 바다는 나를 좋아해. 나는 특별해…….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위험할 저 바다가, 나에게만은 절대로 안전하다는 자신만만한 생각. 그렇게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 때쯤부터는 바다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나밖에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아서,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바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혼잣말을 하는 아이로 찍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바다는 당연히 서운해 했고 화도 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내가 대답을 잘 해줬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불만을 갖지 않았다. 바다는 어떻게 말을 하는 걸까? 바다의 말은 확실히 음성(音聲)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발음 기관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어떠한 파동이 내 온몸으로 직접 전해지며 언어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바다는 왜 그런 식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왜 그걸 나만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방식의 소통이 가능한 걸까. 거기에 생각이 미칠 즈음 나는 열한 살이었다. 여전히 바다와는 친구였지만, 나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에 대한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제멋대로 구는 바다에게 마냥 좋은 감정만 남아있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특별하다는 믿음과 거기서 오는 바다에 대한 신뢰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다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도 품은 채였다. “너는 몇 명이야?” 바다가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이던 날. 평소처럼 포구에 들른 내가 물었다. 돌을 검게 적시고 있던 바다는 내 질문에 킥킥 웃었다. 우리는 아주 많지 “그러니까 얼마나?” 모르겠어 셀 수 없어 세는 법을 몰라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어른 목소리부터 아이 목소리까지. 나는 또 다른 대답을 기다렸지만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질문에 흥미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너는 어떻게 말해?” 몰라 바다는 대충 대답하곤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아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바다는 아쉽다는 티를 냈다. 벌써 가는 거냐고 묻는 바다에게 나는 ‘숙제해야 돼’라고 대꾸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집 쪽으로 걷던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날이 유독 좋아서 바다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새파란 물결들의 흐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가방끈을 꽉 쥐었다. 저 광활한 바다에, 수 없이 많은 인격들이 녹아있다. 어디서 왔고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수한 자아들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나다. 붉은 색 보도블록만 골라 걸으며 지나간 기억들을 생각했다. 내가 바다랑 말을 할 수 있다고 할 때마다 그만 좀 우기라며 다그치던 엄마의 어딘지 걱정스런 눈빛.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던 동생의 표정. 쟤는 혼잣말을 한다며 머리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던 또래들. 그리고 내가 그런 일로 속상해하면 울지 말라고 서툴게 위로를 해오던 바다…….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지만 늘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 “아.” 갑자기 지겨워졌다. 바다의 말 때문에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일들도, 집에 좀 제때 오라고 엄마에게 혼나는 것도, 자기를 매일 보러 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바다를 달래주는 것도.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제일 친한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선박 사고였다. 현장에 갔다가 돌아온 아빠는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친구한테 잘해 줘. 그 말에 나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폭우로 구조 작업이 난항을 겪었고, 바다도 몰아치는 비에 화가 난 상태였다. 사실 아빠가 오기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절대 그 배를 건질 수 없으리란 사실을. 일주일 만에 등교한 친구는 혼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 반 친구들이 함부로 서툰 위로를 건넬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친구는 하필 창가 자리였고, 창 밖에선 바다가 뭐에 성이 났는지 혼자 뭔가 구시렁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바다와 그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친구의 옆얼굴이 괴리감이 너무 컸다. 그 친구와 함께 하교하는 길. 학교에서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떼기가 더 두려웠다. 실내화 가방을 붕붕 흔드는 친구의 팔엔 힘이 없었다. 평소 다니던 길로 나가려는 친구의 손목을 붙잡았다. “오늘은 다른 길로 갈래?” “왜?” 그렇게 묻는 친구에게 대답하는 대신 나는 바다를 살짝 곁눈질했다. 우리가 집에 가는 길은 연안을 따라 일자로 나 있는 길이었다. 내가 바다를 의식한다는 걸 안 친구가 피식 웃었다. “나 괜찮아. 진짜로.” “그래도……. 바다가 그랬잖아.”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째선지 친구 아버지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친구가 죽였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바다는 사람도 생물도 아니지만 분명 내 친군데. 나에게는 안전한 친구가 누군가에게는 살인마라는 사실이 확 와 닿고 말았다. “그치.” 친구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맹한 눈동자에 바다가 비쳤다. “하지만 바다는 바다일 뿐이니까.” 그렇게 대답한 친구는 늘 가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에 한참을 서 있다가 친구의 부름에 겨우 발을 움직였다. 바다는 바다일 뿐이구나. 사람을 죽이고 집어 삼킨 괴물인데도, 친구에게 바다는 그저 바다일 뿐이다. 그 사고과정이 순간 이해가지 않아 나는 멈춰있었다. 친구 뒤를 쫓아 걸으면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바다는 살아있는 존재다. 대화를 할 수 있고 나를 기억하는, 심지어는 친구까지 될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나는 바다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이 겁이 났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바다는 그저 바다일 뿐이다. 사고가 날 수도 있지만 결국엔 그냥 바다인 것이다. 나에게만 바다가 가지는 의미가 달랐다. 그 순간 바다가 해맑게 웃었다. 당분간은 비가 안 올 것 같아 좋아 비는 귀찮아 “조용히 해…….” 내가 작게 속삭였다. 친구는 듣지 못했지만 바다는 들었는지 순간 파도의 움직임이 둔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다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왜?’하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은 후 말없이 걸었다. 친구 앞에서 바다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집에 들어간 후 나는 온 길을 되돌아갔다. 바다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포구까지 숨이 차게 뛰었다. 내가 다시 돌아오자 바다는 기쁘게 나를 맞아주었다. 하지만 나는 바다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왜 그랬어?” 뭐가? 왜? “왜 내 친구 아빠를 죽였어?” 격양된 내 목소리에 바다는 잠시 말없이 출렁였다. 바닷바람이 머리를 마구 헤집고, 귓가로 바람소리와 바다소리가 매섭게 뒤엉켜왔다. “왜 사람을 죽였어?” 죽이지 않았어 바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거짓말.” 나는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혼자는 외로우니까 같이 있고 싶어서 바다가 서글픈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래서 품에 안았을 뿐인데…… 그 말에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시멘트 바닥을 짚은 손이 따가웠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너는 배를 안으면 안 돼.” 왜? “그럼 배가 물에 빠진단 말이야.” 내 말에 바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해하기 싫은 걸지도 몰랐다. 어른스럽던 목소리는 ‘아아아아’하고 내게서 멀어져가고, 어딘지 화가 난 목소리가 대신 대답을 해왔다.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건데 왜 그러면 안 돼? 그 말에 어릴 적부터 매일 들었던 바다의 말이 떠올랐다. 같이 있자. 같이 놀자. 가지 마, 떠나지 마. 정말 순수하게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던 그 말들이, 어느 때는 반갑고 마음이 따뜻해지기까지 하던 그 말들이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너는 그럼 나랑도 같이 있고 싶어?” 그 말에 바다는 빙그레 웃으며 즉답했다. 당연하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의 부름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실내화 가방을 포구에 놓고 왔다는 걸 집에 와서야 알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귀를 틀어막고 한참을 울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오랜 시간 믿어온 친구를 더는 믿을 수 없었다. 그게 내가 바다와 대화한 마지막 날이었다. 열두 살, 바다와의 마지막 대화 이후로도 바다는 계속 시끄러웠다. 처음 몇 달 정도는 계속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내가 무시하자 그 빈도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들어온 말소리를 무시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아주 어렵지도 않았다. 바다에게도 나와 대화를 한 시간보다 자기 혼자 살아 온 시간이 몇 배, 아니 몇 만 배, 몇 억 배는 길 테다. 그래서인지 바다도 생각보다는 쉽게 나를 포기했다. 한탄하듯이 내가 사라졌다고 내뱉는 게 전부였다. 가끔 바다의 말소리는 너무도 처절해서, 나도 모르게 대답할 뻔 한 적도 여럿 된다. 그런 날엔 먼 바다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눈에 띌 만큼 풍랑이 강했다. 왜 우리 말을 못 듣는 거야? 우리에겐 너 뿐인데 그런 말들을 무시할 때면 나도 마음이 안 좋았다. 왜 자기를 혼자 내버려 두냐고 우는 어린 아이를 눈앞에서 내치는 기분. 바다는 바람을 정말 싫어했다. 그리고 오늘처럼 풍랑 경보가 내릴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바다는 내내 끔찍한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정말로 바람 때문에 바다가 고통을 느끼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바다 자신에게도 높은 파도가 치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처럼 바람이 세 파도가 5미터를 훌쩍 넘기는 날엔 바다는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화가 난 바다는 아빠가 탄 배를 집어 삼키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부두 가까이엔 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바다 근처 건물에 사고 가족 대기실을 마련해줬지만 엄마도 나도 그 안에선 초조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멀리 바다에 떠 있는 구조정들의 빛이 더 뿌옇게 보였다. 파도가 세짐에 따라 빛이 보이다가 보이지 않다가를 반복했다. 너희는 들어가 있어. 엄마가 말했지만 나도 동생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엄마는 울지 않았지만 옆에 선 동생은 계속 소리를 내며 울었다. 바다도 울고 있다. 제각기 다른 속도로 파도가 몸을 일으켰다가 쓰러질 때마다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외로워 무서워 화나 바다가 절규하고 있다. 모든 걸 삼키려 하고 있다. 우리 아빠를 구하기 위해 이 날씨에도 바다에 나가야 했던 구조정도 삼켜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빠가 타고 있던 배도, 우리 아빠도. 네가 뭐가 그렇게 무섭고 화가 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내가 더 괴롭고 화나는데. 해경 직원 한 명이 엄마에게 와서 무어라 말했지만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바다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머릿속 구석구석을 괴롭다는 비명으로 때려대는 기분이었다. 나는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주르르 주저앉았다. 동생이 아무 말 없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바다의 절규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귓바퀴에 부딪히고 있는데, 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니. 저 절규를 달랠 수 있는 게 이 세상에 나뿐이라니. 한낱 인간이 어떻게 바다를 달랠 수 있을까. 그런 게 됐으면 그 많은 사람이 죽을 이유도 없었을 텐데. 머리가 아팠다. 바람을 너무 많이 맞은 피부엔 감각이 없다. 한낱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하지만 내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때 엄마가 쓰러졌다. 갑자기 힘없이 픽 쓰러지는 엄마를 본 동생이 비명을 질렀고, 멀리 서있던 해경들이 달려왔다. 엄마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고, 그런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동생이 뭐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런 동생과 엄마를 두고 등을 돌려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 어디 가! 동생이 당황해서 소리쳤지만, 지금은 동생보다 중요한 대화 상대가 있었다. 어릴 적 매일 같이 가던 포구까지 십여 분 정도 만에 달려 도착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서 금방이라도 몸이 넘어갈 것 같았다. 우비를 썼지만 바람이 너무 세서 별 소용이 없었다. 앞머리는 비에 젖어 이마에 축축하게 달라붙었고 안경은 빗물이 너무 많이 묻어 벗은 지 오래였다. 파도는 한 번씩 달려들다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다시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파도가 부서지며 울음소리를 냈다. 나를 두고 가버렸어 내가 초등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말투였다. 바다는 여전히 어리고 순수했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높은 파도였다. 나를 두고 가버렸어 나에겐 너 뿐인데 우리에겐 너 뿐인데 왜일까. 바다는 왜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찾는 걸까. 바다가 살아온 억겁의 시간 속 나는 찰나도 되지 못할 텐데. 그 찰나인 나를 잊지 않고 바다는……. 우리에게 돌아와 나한테 돌아와 계속 나를 부르고 있다. 우리는 네가 필요해 바다가 나를 부르고 있다. 몇 년 전 내가 버린, 나의 가장 특별하고 아름다웠던 친구가 나를 부르고 있다. 갑자기 몰려오는 어떤 무거운 감정에 숨이 막혀서, 나는 양손으로 잠시 입가를 가리고 눈을 감았다. 나는 더는 저 애달픈 부름을 무시할 수 없다. 소름 돋게 무섭지만 가장 특별했던 친구.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다가, 심호흡과 함께 말을 뱉었다. 크게 말하려 했지만 떨리는 숨과 함께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왜 사람들을 데려갔어?” 내 말에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던 파도가 우뚝 멈춰 섰다. 공중에 멈춰선 파도는 비바람에 흩어지며 내 얼굴에 부딪혀왔고 곧바로 다음 파도가 달려들었다. 너 역시 우리 말을 듣고 있었구나 소름 돋을 정도로 순식간에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외롭다고 울부짖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파도가 나를 중심으로 갈라지며 도로에 쏟아졌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왜 사람들을 삼켰냐고.” 네가 우릴 버렸잖아 바다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수없이 여러 번 말을 걸었는데 전부 무시했잖아 다 들리는데 무시한 거였어 나는 한없이 외로웠는데! 바다가 소리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바다의 감정이 전부 나에게 향한 건 처음이었고, 거대한 무생물의 감정은 인간 한 명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깊었다. 바다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나는 모른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끝없는 시간을 살아온 존재의 외로움은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무게였다. “그래서 사람들을 데려간 거야? 외로워서 자꾸 사람들을 삼키는 거야?” 내 말에 바다가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파도가 부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사람들을 삼키면 그들은 모두 외로워해 나랑 같이 있는데도 외로워한다고 그러다 죽어버려 “너는 혼자가 아니잖아. 너는 ‘너희’잖아. 그런데도 외로워?”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우리지만 다 같은 우리인 걸 다른 존재가 조금도 없는 우리인 걸 뭐가 모여서 바다를 이루고 바다의 의식을 만든 걸까. 어째서 집단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로워하는 걸까. 저렇게나 긴 시간을 살아왔으면서. 멀리 깜박거리는 구조정을 보았다. 불빛은 파도가 거세지며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가 탄 배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다들 아직 살아있을까. 우리 밖엔 다른 것들이 더 많은데 아무도 나랑 얘기하지 않아 심지어는 너조차도 우릴 떠났어 유일하게 내 말을 듣던 네가 말이야 힐난하는 어조를 듣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누군가에게 바다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겉보기엔 푸르고 평화로워 보이는 그 아래엔 눈을 멀게 하는 짙은 어둠이 있고 공허한 절규가 있다. 그리고 그 절규를 나만 들을 수 있다. 바다는 생명의 보고지만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니다. 대체 나는 무엇의 말을 듣고 있는 걸까? 그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바다는 신이 아니고 나는 인간이다. 바다의 말을 듣는다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나의 일이 아니었으면 했다. “나는 네가 무서웠어.” 바다는 내 말에 잠시 조용해졌다. 여전히 거칠게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지만, 파도의 끝은 결국 내게 닿지 못하고 부서졌다.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친구인데, 누군가에겐 아니라는 게. 나에겐 친절하지만 누군가에겐 난폭하다는 게, 누군가에겐 살인자라는 게.” 그게 너무 무서웠어. 바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다가 무섭다. 우리 아빠와 아빠의 동료들을 집어삼키고 아래로 끌고 가려는 바다가 무섭다. 세상이 이렇게나 발전했어도 뒤집어진 배 하나 꺼낼 수 없다. 인류가 달에 가고 태양계 너머로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지만 바다에 빠진 배 하나 꺼낼 수 없다. 그런 거대한 존재를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저 존재가 외로워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라면, 적어도 나는 그걸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존재지만 나만이 저 분노를 달랠 수 있었다. 눈앞에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깊고 두려운 존재. 그 존재의 말을 나만이 들을 수 있다. 바다의 부름에 나만이 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네가 그리운 순간이 분명 있었어. 네가 무섭고 싫었지만 네가 소중한 순간도 분명 있었어.”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고, 바다는 조용히 내 목소리를 들었다. 잔뜩 화가 나선, 파도에 분노와 애증과 그리움을 동시에 담은 채. “내가 너를 외롭지 않게 해주면 아빠를 돌려줄 거야?” 내 물음에 파도가 높게 일었다. 아무 대답 없이 파도는 공중에 잠시 머무르다가 갈라졌다. 나는 도로 끝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다시 물었다. “내가 네 말을 다시는 무시하지 않는다 하면, 앞으론 사람들을 안 데려갈 거야?”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내 말에 바다가 고개를 들 듯 파도를 한 번 크게 일렁였다. 반항적인 어조였지만 나는 그 파도를 본 순간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그 몸짓을 본 이상, 더는 바다를 무시해선 안 됐다. 그 어리고 순수한 기대감을 무시해선 안 됐고, 결심해야 했다. 나는 이제부터 바다의 말을 듣겠노라고. 이미 우릴 한 번 버렸으면서 우린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워했는데 들은 체도 안했으면서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제발.” 우리 아빠 돌려줘. 오른쪽에서 불빛이 달려들었다. 경적과 함께 타이어가 도로에 긁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러오고 피할 새도 없이 나는 자동차 전조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찰나의 순간에 파도가 가드레일을 넘어와 나와 자동차를 뒤덮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센 파도에 휩쓸린 자동차는 밀려나며 뒤집혔고, 나는 자동차 반대방향에 있는 가드레일로 끌려가 부딪혔다. 내가 부딪히자마자 파도는 아래로 사라졌고 나는 뒤집힌 자동차를 보며 기침을 했다. 안경도 없는 탓에 눈앞이 흐렸다. 정말 나를 다신 안 떠나는 거야? 바다가 조용히 물어왔고 나는 물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정말 내게 돌아와 주는 거야? “그래.” 이제 내 말 무시 안 할 거야? “그래. 너희 말 무시 안 할 거야.” 다시 내 말에 대답해주는 거야? “그래.” 나는 네가 없어서 너무 외로웠어. 고개를 들고 새까만 바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지만 파도가 조금씩 잔잔해지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한참을 울다가 지쳐서 울음을 그치는 것처럼, 천천히 느릿느릿 바다는 힘을 빼고 있었다. 멀리 구조정의 불빛이 넘실거리며 점점 육지로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바다가 바람의 흐름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배를 아예 해안가로 보내려는 모양이었다. 아빠가 아직 살아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바다가 정말 나를 돕기로 다짐했다면 분명 아빠를 돌려줄 것이었다. 바다는 기쁨의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기절해 있는 와중에도 바다가 내게 건네는 말이 간간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네 아빠를 배에서 꺼냈어.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말에 안심한 채 눈을 감았다. 바다의 기분 좋은 노랫소리가 빗소리와 파도 소리 사이로 멀어져갔다. 도현정(컴퓨터과학과) 졸업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하던 중 이렇게 입선이란 결과를 받으니 기쁩니다. 어릴 때부터 바다 가까이 살며 해상 사고 소식을 자주 접했고 그런 제게 바다는 아름답지만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바람이 센 날 파도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바다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해서 바다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써보고 싶었어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 심사평]
강옥희 교수(국어교육과) 올해 학술상 소설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총 7편이었다. 작년보다는 저조한 결과를 보면서 글보다는 영상을 소비하고 생산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세대에게 글을 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한 이유인지 올해는 응모한 작품의 수도 적고 응모작의 상당수가 서사적인 골격을 갖추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중 최종적으로 선자의 손에 들어온 작품은 윤지예의 「미래로부터」(글로벌지역학부)와 도현정의 「바다가 부른다」(컴퓨터과학과)였다. 윤지예의 「미래로부터」는 어릴 적 바닷가마을 횟집 수조에 갇힌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며 동정과 체념을 배운 한아가 인어 미래와 만나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 장기이식을 위해 만들어진 미래라 불리는 인어와 한아와의 우정을 통해 과학기술과 윤리적 삶, 감정의 문제들을 소설적 서사로 잘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장기이식을 위한 인어의 설정이나 인어 미래의 장기 이식 과정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노벨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를 보는 듯한 기시감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 솜씨와 문제의식을 높이 사 가작에 선한다. 도현정의 「바다를 부른다」는 바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주인공과 바다 사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서술하고 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교적 매끄럽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격려의 의미로 입선에 선한다.
[시 가작] 주인공
<주인공> 옷깃만 스쳐도 설레고 분홍색 하늘이 비추고 눈이 마주치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이 뻔한 시들 그 뻔한 소설들 똑같은 사랑 노래들 그런 뻔한 것들을 찾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뻔한 그 말들이 내 마음을 두드리는 순간 모두가 보게 되는 뻔한 말이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 아닐까 안병선(휴먼지능정보공학과) sns를 보다가 달달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댓글 중에 ‘내가 옛날엔 이런 말을 어떻게 하고 다녔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오글거리기도, 로멘틱하기도 한 말들이 있는데 제 시도 어떻게 보면 되게 오글거리고 흔한 말이지만 언젠가 사랑에 빠진다면 한번쯤 생각이 나게 되는 시가 되면 좋겠습니다. 공대생이지만 가끔은 문학도가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 입선작] 편의점
<편의점 > 저녁에 술 한 병 사가는 손님 얼마 있다가 다시 와서 술과 안주를 사가는 아까 본 손님 다음 날 아침 박카스 한 병을 사가는 어제 본 손님 향긋한 날 하루를 시작하는 곳도 고된 날 하루를 정리하기 위해 들리는 그곳, 편의점 변예진(경제금융학부) ‘편의점’이라는 시는 제가 아르바이트하면서 자주 뵙던 한 단골손님을 시상으로 적은 시입니다.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손님이 구매하는 물건을 보고 느낀 점을 담백하게 시 속에 녹여 내보려고 했습니다. 상상만 하던 시 짓기를 이번에 처음 도전하게 되어 고뇌하던 순간 자체가 뜻깊은 경험이었는데 입선이라는 결과까지 얻게 되어 놀라기도 하고 감사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욱 발전하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다양한 글짓기에 도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 심사평]
최미숙 교수(국어교육과) 인터넷에 읽을거리,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시대에 시를 쓰고 읽는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멀리하고, 만나서 나누는 대화조차 꺼려하는 이 유례 없는 코로나 시대에 시 쓰기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항상 그러했듯 우리가 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내면 나아가 세계 속에 내던져진 자신과 가장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새삼스러움을 올해 응모작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올해 응모작들은 크고 무거운 주제보다 우리들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감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작년 응모작들은 코로나가 가져온 우리 삶의 급격한 변화에 집중하는 시적 경향을 보여주었는데, 올해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다양한 측면에서 응시하는 작품 경향을 보여주었다. 시적 경향은 다양해졌으나, 심사 과정은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시적 발상은 좋았으나 시상의 전개나 마무리 측면에서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적 발상만큼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니 앞으로 멋진 시 창작을 기대해도 될 것이다. 올해는 가작과 입선만을 선정했다. 두 작품 모두 일상 삶에서 느끼는 진솔한 서정을 담고 있다. 문득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시로 녹여 낸 작품들이다. 가작으로 「주인공」을 선정했다. “뻔한 시들”, “뻔한 소설들”, “똑같은 사랑 노래들”도 “내 마음을 두드리는 순간” 그것은 어느 것 하나 뻔하지 않은 “나만의 이야기”가 된다. “뻔한” 것들이 나의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나만의” 특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그 뻔한 시, 소설, 사랑 노래와 지속적으로 함께 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입선작 「편의점」을 읽노라면, 어두운 밤에도 불을 켜고 항상 우리를 반겨주는 동네 편의점이 떠오른다. 시의 화자에게 편의점은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이다. 고된 일을 마치고 저녁에 “술 한 병”을 사가고, “다시 와서 술과 안주”를 사가고, “다음 날 아침 / 박카스 한 병을 사가는” 그 “손님”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덤덤한 듯 편의점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지만, “손님”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평론 당선작]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작품 감상 링크: https://blog.naver.com/smuhakbo/222592443025 영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예술이며 산물이다.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그리고 방식, 그곳에서 지켜져야 할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상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물론 영화를 보고 그것을 개인화 시키는 것은 관객의 몫이지만 더 나은 삶의 필요성을 담지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하나의 문화예술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혐오”, “무관심”, “언택트” “개인주의” 이 단어들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현주소다. 코로나로 가속화된 언택트 사회 속 우리는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은 타인의 관계로부터 정의되는 사회적 동물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한 객체로서 살아가지만, 유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이 확장되어 공통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는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가 이루어진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속에 너무도 흔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며 나의 가족의 이야기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그걸 왜 알아야하는데?”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묻고 싶다. 이것이 너, 혹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이라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와 지켜져야 할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목수 일을 하며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속에서 그는 ‘댄’이라고 불려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인이자 할아버지인 그는 목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집 앞 마당에 개똥을 치우지 않는 이웃에게 잔소리도 하고 항상 시끄럽게 떠드는 이웃에게 주의를 주기도 한다. 다니엘은 그렇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며 한 인간이다. 다니엘 뿐 만 아니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은 특별히 영웅적인 인물로 설정되지 않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다. 영화의 제목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인 것처럼 영화는 꾸준히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 자신을 강조하고 드러낸다. 이는 다니엘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구인정보기관을 걷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직 상담을 받기 위해 센터에 찾은 다니엘의 모습은 북적이는 센터 사람들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고 이것은 영화의 제목에서 강조하는 ‘나’가 다니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영화는 다니엘이 평소에 앓던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그의 일상에 균열이 생김을 알리며 시작된다. 의사는 다니엘에게 일을 잠시 쉬고 휴식을 취해야한다고 말한다. 건강 악화에 따라 당장은 일을 쉬어야하는 다니엘은 쉬는 동안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질병수당을 신청하지만 국가는 그에게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며 질병수당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한다. 다니엘은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마냥 받아들일 수 없다. 질병수당을 받지 못하면 그는 당장 추위와 굶주림에 잠식되기 때문이다. 그는 결과에 항고하기 위해 관공서에 전화를 걸지만 길고 긴 관공서의 구린 전화 대기음 끝에 들려오는 말은 정식 통보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뿐이다. 하지만 다니엘에게 당장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에 그는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관공서에 찾아간 그는 또 한번의 좌절을 맞이한다. 모든 신청은 인터넷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관공서 직원은 말한다. 영화는 다니엘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제동을 거는 허울뿐인 제도와, 규칙들을 끝없이 나열한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는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 어느새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아버리는 기계의 발전이다. 문명의 발달과 혁신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그저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되며 주류에서 밀려나 도태된다. 조금 더 편리하고 나은 세상을 위해 개발되는 기계, 서비스는 오히려 최하류층을 양산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기재로 작용한다. 이는 관공서에서 실업급여 신청을 인터넷으로만 해야 하는 줄 알았지만 종이로 뽑아 신청할 수도 있었다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어두운 화면 속 기계적으로 다니엘에게 건강상태를 묻는 담당자의 태도와 목소리는 다니엘을 궁지에 몰아넣는 기계와 혁신을 상징화 하는 부분이다. 심장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온 다니엘에게 의료진은 심장과는 전혀 관계없는 손, 발가락, 팔에 대한 상태만 묻고 심장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다니엘의 말은 묵살한 채 그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일관적이며, 인간적 감정조차도 배제되어 보이는 의료진에 태도에 다니엘은 “심장과는 점점 멀어진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이는 ‘심장’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신체적인 단어를 넘어 마음이라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제도, 기계를 상징화 하는 의무적인 태도의 의료진은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니엘과 케이티가 나누는 연대, 즉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은 기계적이고 차갑게 변해버린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감정일 뿐인 것 이다. 영화에서 다니엘은 딜런에게 “코코넛과 상어 중에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건?” 이라는 질문을 한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딜런은 코코넛이라고 대답하고 다니엘은 정답이라 말한다. 딜런과 다니엘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퀴즈는 달콤하고 따뜻한 봄날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던 복지제도가 그것에 의지하는 수많은 케이티, 다니엘을 궁지에 몰아넣고 죽어가게 만드는 주범임을 상징한다. 관공서에 다니엘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다니엘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 속 관공서는 소외된 계층으로 가득 차 있고 이들 모두는 다니엘과 케이티처럼 국가가 만들어 놓은 한낱 작은 제도에 의지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수많은 다니엘과 케이티를 위해 만들어진 달콤한 코코넛들은 오히려 상어처럼 눈에 보이는 위협보다도 더 위협적으로 그들의 삶 주변부에만 자리할 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찬양되는 디지털시대는 늘어난 수명과 함께 고령사회에 접어든 사회의 흐름은 간과한 채 세대 간 소통의 부재를 가속화 시킨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견고히 하며 사적, 공적 복지를 약화시킨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시대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며,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새로운 것은 누군가의 현재를 위협하기도, 좌절시키기도 한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에 가로막힌 다니엘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누군가에게나 평등하고 공평하게 적용되어야할 법의 부재이다. 영화는 일률적으로 움직이는 관공서 직원들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의 표상을 취하지만 정작 도움을 받아야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차갑고 냉정하기만 하다. 관공서 직원 중에 유일하게 다니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친절한 직원은 규칙에 어긋난 서비스라며 핀잔을 받는다. 결국 다니엘의 인터넷 신청을 도와주는 건 또 한명의 약자인 흑인 청년뿐이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의 문제는 내부에서 표출되어 해결되지 못하고 그들의 문제로만 남게 된다. 이는 영화 종반부 다니엘이 실업 급여를 포기하고 관공서에서 나와 벽에 페인트로 영국 사회에 내던지는 경고의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린 통화음을 바꾸고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원한다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응원을 하는 건 소외받는 계층이며, 흑인, 수많은 다니엘들 뿐 이다. 영화에서는 특정한 악인이나 주인공의 적대자는 등장하지 않지만 관객은 다니엘의 답답한 상황에 분노를 슬픔을 느낀다. 이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조차 모르겠는 근본적인 원인의 부재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안타고니스트로 작용하는 것은 거대한 사회, 국가이며 이들로 인해 당연한 권리를 제공받아야 할 주인공들의 목표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고 아프면 질병 수당을 받으면 되는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권리는 그들에게는 쟁취해야할 목표로 자리 잡는다. 주인공들의 안타고니스트는 빠르고 효율적인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관공서 직원들로 상징화 된다. 그들은 그저 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만 존재하며 표면적으로만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하수인들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에 좌절하는 다니엘에게 관공서 직원들은 앵무새처럼 사무적인 안내만 반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니엘은 케이티를 만난다. 케이티는 다니엘과 같이 실업급여를 받는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상담시간에 단지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지원금은 삭감되고 만다. 다니엘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분노하고 사람들 또한 케이티의 실수를 괜찮다며 넘어가주지만 로봇 같은 관공서 직원에게 인간적 관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계속해서 복지국가의 모순에 대해 질문한다. 그들이 말하는 복지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것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영화 속 모순은 비단 영국 한 나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개선되었지만 2019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엔 장애등급제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이는 국가가 정해놓은 일률적인 기준에 따라 장애정도를1~6등급 까지 정해놓고 등급을 매기는 제도이다. 등급에 따라 지원되는 지원금의 정도, 활동보조를 지원받을 수 있는 시간의 차이가 있기에 장애등급제는 장애인들에게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장애등급제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장애인 개개인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2021년 현재 폐지되었지만 활동보조 축소, 실질적인 장애인의 처우 개선은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여전히 장애인들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그들의 생사는 공공기관이 정한 서류 한 장에 결정 될 뿐이다. 이는 영화 속 다니엘의 생사가 관공서에서 보내진 종이 한 장에 결정되는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할 다니엘과 케이티는 그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벼랑 끝에 몰린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서로가 나누는 작은 연대이다. 그들이 나누는 연대는 최소한의 인간적 나눔이며 위로이다. 다니엘은 그들의 허름한 집을 고쳐주고, 차가운 공기가 가득찬 집 창문에 비닐을 붙이는 방법을 알려주며 그곳에 온기를 채워나간다. 그렇게 케이티와 다니엘은 어느새 친구가 되고 차가운 현실 속 따뜻한 감정을 나누며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을 보여준다. 케이티를 향한 다니엘의 위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는 식료품점에서 굶주림을 못 참고 통조림을 까먹는 그녀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살기 위해 성매매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발견하고 나서도 그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준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작은 연대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잔인한 현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케이티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살고자 발버둥 치고 이러한 케이티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욕구는 낡아빠진 집을 계속해서 청소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케이티는 더러운 화장실 벽을 벅벅 문지르며 닦아내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된 타일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리고 만다. 화면 전경에 배치된 두 개의 벽 사이로 주저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찌그러진 깡통의 모습을 형상화 한다. 살아가야하기에, 살고 싶기에 행해지는 그녀의 여린 날개짓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현실은 그녀의 삶을 더욱 잘게 조각낼 뿐이다. 케이티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이력서를 돌리고 청소 일을 하지만 일자리는 여전히 부족하다. 영화 초반부 다니엘의 호의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녀의 눈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빛을 잃어간다. 마치 점점 벼랑 끝에 몰리는 그녀의 생활을 대변하듯 말이다. 영화 속 케이티가 위생 용품을 훔치는 장면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존재하는 영국 사회에서 낯설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존재하는 사회복지제도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2016년 5월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과 휴지를 사용하는 일명 “깔창 생리대 이슈”는 영화 속 케이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는 불과 5년 전의 일이다. 영화는 영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관객은 왜인지 다니엘과 케이티가 살아가는 사회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영화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한 국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어쩌면 현재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케이티는 식품 지원소 구석에서 뭔가에 홀린 듯 통조림 뚜껑을 따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케이티를 본 안내 직원은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고 케이티는 너무 배가 고팠다며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케이티의 눈물 어린 호소를 비웃기라도 하듯 살기 위해 성매매까지 감행하게 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훼손은 존재자체의 위협과 다름없다. 이러한 위협은 다니엘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질병 수당을 기각 당한 다니엘은 실업 급여라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처지에 놓여있지만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노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를 관공서에 제출해야 한다. 살기위해 자신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임을 증명해야하는 절차는 한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짓밟는다. 결국 그는 허울뿐인 자기소개 작성 특강을 듣고, 자신이 평생을 쌓아왔던 목수 경력을 들어 이력서를 돌린다. 하지만 다니엘의 몸은 여전히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의사 또한 그에게 쉬어야한다고 말한다. 결국 일을 하지 못한 그는 관공서에 자신이 들은 자기소개서 특강 이력과 취업을 위해 노력한 증거를 제출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며 실업 급여대상이 안된다고 말하고 다니엘의 자기소개서가 특강에서 안내된 양식처럼 기재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제재 대상이 된다. 이는 사실상 다니엘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관공서는 다니엘에게 선택을 하라고 강요하지만 그에게 선택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정해진 규칙을 강요받을 뿐이다. 아파서 일을 못하지만 그 고통과 상태의 정도를 증명해야지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그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 결국 그는 언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질병 수당 결과에 항고를 하기로 결정한다. 영화의 창작자인 켄 로치 감독은 복지국가의 이상인 영국의 구조적인 모순과 허점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영화 속 사회는 복지 국가의 주체만 존재할 뿐 대상은 부유한 채 고정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뿐이다. 이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한순간에 삶의 방향을 잃은 우리사회의 소시민의 모습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어쩌면 약자를 위한 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법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기에는 너무도 허접하며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존엄성과 권리를 박탈당한 인물들은 케이티와 다니엘뿐만 아니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식료품 지원소의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 과 거리에 부유하는 노숙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감독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에 대한 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는 어떠한 감정의 호소에도 의지하지 않는 객관적인 카메라 워킹에도 드러난다. 다니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질병 수당 항고 날 그는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결국 항고 일에 전하고자 했던 그의 말은 케이티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카메라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미동 없는 다니엘의 모습을 케이티와 관계자 사람들의 어깨너머 풀숏으로만 보여준다. 영화의 종반부 다니엘의 장례식에서 그가 전하고자 했던 말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아닙니다. 또한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니엘은 일을 할 수 없는 몸 상태였고 그렇기에 정당한 복지 혜택을 받아 건강을 되찾고 다시 그가 사랑하는 목수 일을 하며 한 인간으로서 그가 누려야 할 삶의 권리를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들이 다니엘과 케이티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고 그로인해 다니엘은 모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기표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케이티는 삶의 밑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강했던 다니엘은 자신,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대변해 세상에 소리쳤고 함께 분노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견고하게 자리 잡은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삶은 붕괴됐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 감독이 꼬집는 복지 구조의 모순,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기계와 문명의 혁신은 과거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가까이에 존재하는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이다. 영화를 보는 누군가는 끝없이 항의하고 불평하고 질문하는 다니엘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영화에 귀기울여야하는 이유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온한 삶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남겨질 수많은 다니엘들이 자신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누리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 연대하고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감독은 말한다.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며 필요하다고 외쳐야 한다.”고. 황혜진(영화영상전공)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요? 영화를 전공하기 전까지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의문점을 가지는 것부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그런 제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써내려갔습니다. 제 작은 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다니엘들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면 정말 기쁘고 가슴 벅찬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사랑하시고 행복하세요!
[평론 가작] <무드 인디고> 속의 색채 분석
<무드 인디고> 속의 색채 분석 작품 감상 링크: https://blog.naver.com/smuhakbo/222592437743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 작품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상을 통해 드러나는 색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영상미가 얼마나 뛰어나는가,이다.작품을 볼 때,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다 다르겠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색이 주는 시각적 효과,즉 영상미가 좋은 작품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내가 알고 있는 작품들 중 색을 표현하는 방법이 단순하지 않고,기발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색을 표현해 낸 작품이 있다. 바로,영화 <무드 인디고 (MoodIndigo)>(2014)이다.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되는 순간을 비비드 색,행복한 결혼 생활을 즐기는 순간을 파스텔 색,주인공이 병이 들어 지쳐가는 순간을 모노 색,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 비극으로 결말이 이어진 부분에서는 흑백으로 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이 영화 속의 색의 묘사는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 나타나며,단순히 인물의 고유의 색을 부여한 작품과는 다르게 색을 표현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의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의 배경에 따라 변하는 색의 묘사와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 및 요소들을 색채와 연관 지어 분석해나가려고 한다.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 (MoodIndigo)>(2014)의 주된 이야기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이지만,이것이 결코 단순하게 풀어낸 것이 아닌 다른 영화와는 구분되는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랑의 색을 풀어낸다.칵테일을 제조하는 피아노를 발명해 부자가 된 콜랭은 우연히 클로에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하고,결혼까지 하게 되지만,여자 주인공 클로에는 페에 수련이 피게 되는 불치병에 걸리고 만다.치료비를 벌기 위해서 남자주인공인 콜랭은 열심히 돈도 벌고,치료에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클로에의 병을 극진히 간호하지만,클로에의 병이 재발하며,결국엔 클로에의 비극으로 영화가 점점 마무리 되어 간다.이 영화에서의 색의 표현은 단순히 인물에게 고유의 색을 지정한 것이 아닌 남자주인공 콜랭과 여자주인공 클로에의 사랑의 색을 묘사해 나타나고 있다.그렇기에 인물의 심리와 스토리에 따라 사랑의 색이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칵테일을 제조하는 피아노를 발명해 부자가 된 콜랭이 우연히 클로에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단계까지의 영화장면이 비비드한 톤(vivid tone)으로 표현된다.비비드는 「발랄한・밝은・선명한・눈부신・생생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색채에서의 비비드는 가장 채도가 높은 선명한 색을 말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 등장한 주변 건물이나 소품들이 노란색,청록색,연두색,분홍색 등으로 채도가 높고 선명하여 밝은 느낌의 분위기를 전해준다.또한 클로에가 입은 옷의 색은 비비드한 컬러의 노란색은 명량,활발,환희 등의 의미가 와닿았고,편안하고 부드러우며,긍정적인 이미지가 돋보였다.콜랭은 명도가 높은 회색 컬러로 밝은 느낌과 점잖음,겸손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한다.전체적인 분위기나 느낌이 난색들의 계열로 따스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밝은 모습이 느껴졌다.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의 밝은 감정과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듯한 느낌을 영화 속에 잘 녹여내어 표현 한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콜랭과 클로에는 마침내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결혼을 하고,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는 단계를 파스텔 톤(pastel tone)으로 표현했다.파스텔은 파스텔로 그린 것처럼 부드럽고 옅은 색을 총칭하며,페일 톤이나 라이트 톤,라이트 그레이의 톤과 같은 고명도의 색조를 말한다.이 때의 배경은 비비드한 모습보다 채도가 옅어진 것을 볼 수가 있다.연한 보라색,연한 분홍,연한 주황,연한 연두 등 옅은 색들을 사용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또,고명도의 색조를 사용하고 있어 명도가 높을수록 가벼운 느낌을 주는 중량감 또한 느낄 수 있다.화면 전체의 톤은 비비드한 톤의 밝았던 분위기와는 다소 다르게 채도가 살짝 빠져 연한 느낌의 부드러움을 가져다주고,안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또한,콜랭과 클로에가 결혼하는 장면에서 입은 복장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였는데,웨딩드레스의 색은 흰색으로 청순,결백,신성,청정의 의미를 가져다줬고,턱시도의 색은 검정으로,기존의 부정적인 의미가 많은 검정과는 다르게 모던,고급 시크함,세련됨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콜랭과 클로에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세 번째로는,클로에의 페에 수련이 피게 되고,콜랭은 이런 클로에의 소식을 듣게 된다.콜랭은 클로에의 치료를 위해서 전 재산을 바치지만 이마저도 돈이 부족해져,일을 하고 만다 클로에의 투병 생활과 치료에 전념하는 콜랭의 모습들의 단계를 모노톤(mono tone)으로 보여주고 있다.모노톤은 전체 이미지의 톤의 형태가 단색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며,흑백을 이용하기도 하고, 하나의 단색으로 전체 톤을 구성할 수도 있다.주인공이 병이 들고 지쳐 힘겨워하는 장면들에서는 채도가 거의 없고,빛이 사라진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파랑,cyan,청의 한색계열의 색들은 어두움,쓸쓸함,서늘함,차가움 등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창문으로 수련이 들어오는 장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또한,수련이 폐에 들어와 얼어붙는 과정에서 흰색으로 서리가 가득 낀 장면은 온도감은 낮고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심장의 색은 짙은 빨간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가져다준다.배경이 모노 톤으로 깔린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조용하고,서늘한 온기들이 느껴지는 부분들인 것 같다.단색으로 한 층 정돈된 분위기를 느끼게 하여 클로에의 투병 생활이 얼마나 고되고,힘들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게 해 준 장면들이였다. 마지막으로는,클로에가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콜랭이 클로에의 장례를 치르는 모습까지를 흑백톤(colorless tone)으로 보여주고 있다.흑백은 색상이 대비되는 흑과 백의 두 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클로에의 죽음이 전체적인 블랙톤으로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검정색은 허무,절망,부정,암흑,죽음 등의 어두운 부정적 이미지를 가져다준다.이러한 색의 연상 언어들 중에서도 죽음,절망의 단어가 크게 와닿는다.클로에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겪고 있는 콜랭의 모습이 허무하고,절망적인 감정들 또한 느낄 수 있게 된다.또한 낮은 명도로 인해 강조되고,집중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콜랭과 클로에가 철도길 위에서 걸으며 백색의 깃털이 휘날리는 장면에서는 흑과 백의 명도 차이가 분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나 흰색 깃털들이 밝고 진출된 느낌을 보여줬다.반면에 콜랭과 클로에의 옷과 주위의 배경은 채도가 거의 빠져 비극의 결말을 암시한 색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마냥 좋기만 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이 점점 잃어 흑백이 되어버린 결말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 (MoodIndigo)>(2014)에서 인물의 심리를 나타내는 색과 전체적인 배경의 색감, 인물의 의상 속 색의 의미, 색의 연상이나 색의 온도감, 색의 대비 등 영상 속에 담긴 아름다운 영상미를 다양한 시각으로 색채를 바라보고 분석해봤다. 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이 인물의 심리와 스토리에 따라 색이 변하고, 점점 색을 잃어가는 모습을 작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처음 남녀가 사랑에 빠져 사랑이 시작되는 단계를 비비드 컬러였다면, 마지막은 여주인공인 클로에의 죽음의 비극으로 색을 완전히 잃어버린 흑백 컬러까지 채도가 있고, 없고의 완연한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색상대비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색채를 가지고 인물의 심리나 성격, 색의 상징적 의미,대비효과 등을 볼 수 있으며,영화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은서(스마트정보통신학과) 영화 <무드인디고>를 보며 처음 영화 속 장면은 아름다운 색들로 가득했지만, 영화가 전개될 수록 점점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장면들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영화를 본 후에도 스토리적으로나 색을 표현한 방식에 대해 계속 여운이 남기도 했고, 영화 속에 색을 이런 방식으로 녹여내고 담아낼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 영화를 색과 엮어 글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가작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평론 심사평]
정의진 교수(프랑스어권지역학전공) 이번 상명학술상 평론 부문에는 모두 3편의 응모작이 투고되었다. 예년과 비교해 투고 편수가 적은 듯 보여서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다. 평론은 글을 쓰는 사람의 독자적인, 나아가 창조적인 관점과 감수성을, 글의 내적인 논리 구성을 통해 타인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능력은 학업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여러모로 필요한 능력이므로, 좀 더 많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면 한다. 올해의 당선작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평론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상황의 심화, 영국의 사회복지제도와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처지 사이의 괴리 등 영화의 핵심 문제의식을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과 대비시켜 분석하고자 한 관점의 진지함, 이러한 관점을 다른 투고작들에 비해 성실한 논지 전개로 풀어나간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줄거리에 대한 요약이 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서, 평론의 관점과 논점이 더 선명하게 부각 되도록 좀 더 압축적이고 정리된 논지가 전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작인 ‘<무드 인디고> 속의 색채 분석’은 미셸 공드리의 영화에서 활용된 다양한 색채들을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설득력 있게 분석하였다. 개별적인 분석들은 일정한 설득력이 있으나, 장면들의 편집을 통해 작품에 고유한 시간성을 구성하는 영화예술의 특수성을 고려한, 영화의 시간적 전개 과정과 색채의 변화 양상에 대한 좀 더 면밀하고 구체적인 분석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화 당선작] 겨울비
김예림(만화애니메이션학과) 혼자서 그려냈던 제 만화가 수상을 하고, 학보에 실려 제가 아닌 다른 학우들도 이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이번 수상이 저를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지금의 기쁜 마음을 생각하며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그려나가고 싶습니다. 짧은 만화이지만 누군가가 학보를 통해 제 작품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울림을 받을 수 있었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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